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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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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목_"새겨들어라"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4-25) 들은 것을 소화시켜 자신의 삶 안에서 결실을 맺으려고 부단히 힘써야겠다.
2020년 1월 26일_"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1,17) 코린토 교회에 분열이 일었났다는 소식을 바오로 사도는 전해 듣고는,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는 복음 선포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기초', '뿌리'를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의 해결은 결국 예수님한테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탄,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 방식을 알아듣기 위해 오늘도 기도해야겠다. 아래의 영상의 카르투지오 봉쇄수도원 관련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듯 보인다. htt..
2020년 1월 25일_주님께서 그대에게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 6,24-26) 주님께서 그대에게 이 말이 개인적으로 좋다. 전례에서 사용하는 2인칭 용어. 세 삼자가 주님을 대신해서 축복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그대), 그리고 그대(그대를 지칭하는 이)가 있다.
1월 23일 목요일,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분명 나 역시 큰 무리처럼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성경을 처음으로 제대로 읽으면서 말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신세계처럼 보였다. 소위 그분은 수퍼맨 같았다. 나에게 우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는 그분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따르고 있는가? ...
1월 21일 상황 파악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5-26) 안식일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준 율법이다. 그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제도이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마치 안식일을 하느님으로 절대화해서 숭배한다. 사람보다 안식일을 그 위에 둔다. 급기야 사람의 아들 보다 안식일을 그 위에 두는 우를 범한다. 이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안식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안식일일지라도 사람의 ..
1월 20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9-20) 때와 장소를 구분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경계가 모호할 때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혼인 예식과 장례는 단번에 구분이 된다. 그러나 혼인과 장례가 같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의 공생활은 혼인 잔치다. 그러나 혼인 잔치가 끝나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곧 있을 것이다. 비단 예수님 삶만이 아니라 현재는 기쁨과 슬픔, 고뇌가 공존하는 시대다. 지금이 어느 상황인지를 알면서 살아가야겠다고 묵상했다.
1월 18일 토요일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6)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즉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질문을 하기도 한다. 혹은 그냥 관심이 없다는 듯 '쿨'하게 지나친다. '왜' 그렇까는 질문은 유효함을 넘어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 적절한 말과 행동을 찾지 못하면서 계속 반박할 구실을 찾는 것은 어리석음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님 말씀이 아닌, 내 주관대로 예수님과 세상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1월 13일, 가족과 헤어짐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9-20) 제베대오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기존 인연과의 단절이다. 그것은 부모와 헤어지는 거,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는 거다. 이를 확장해서 보면 나에서도 벗어나는 거. 내 입장에서는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거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누군가와 이별을 한다. 부모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또 다른 연결을 준비한다. 그리고 완전한 연결은 주님 안에서 그것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