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823) 썸네일형 리스트형 참회 고행의 날 5.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공포한 교회법 제1251조와 제 1253조에 대한 보완 규정(참회 고행의 날 규정)에 따라, 1) 연중 금요일 재는 금육이나 금주, 금연, 선행, 자선, 희생, 가족 기도로 지킬 수 있다. 2) 재의 지킴으로 절약된 몫은 자선 사업에 사용하도록 한다. 출처 : 전례력 나해 28쪽 대화 를 보면, 안정환 감독이 선수들한테 필드에서 서로 대화를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축구 경기 중에 서로 대화를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상대 선수가 작전에 눈치를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화란 잡담과는 다른 의미의 소통 수단이다. 비록 상대 선수가 눈치를 채더라도 정확한 의사 전달이 더 먼저인 것이다. 물론 작전대로 진행되면 많은 대화는 필요 없겠지만. 이뿐만 아니라 대화는 같은 편 선수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팀 플레이를 해야 하는 축구에서 ‘대화’(신호, 싸인)가 필수적이라면, 사목 현장에서 대화는 필수적이다.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신호를 줘야 한다. 그런데 대화가 잘 되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수시로 대화해야 할 수 있고,.. 19세기 말 19세기말에는 지금과 같은 통신 수단이 없었다. 휴대폰, 전화, 인터넷. 그런데 더 잘 연결된 느낌은 왜일까? 당시 한국 교회와 나가사키 교구와의 연결 말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라틴어 기도서 보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파리외방선교사들 통해서. 선교 열정이 대단한 것 같다. 지금은 물리적으로는 훨씬 더 잘 연결되어 있지만, 그 외 다른 면에서 멀게 느껴진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통신 수단의 발달과는 별개인 것 같다. 아무리 세계화가 되어도 사람 사이 연결은 과거보다 더 못한 것이 아닐까. 휴대폰에 연락처는 많지만 정말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 측면은 아마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19세기말 한국 교회는 박해시기였다.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보편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였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 운현궁 잠시 관람 10분 정도 교의 척화비 당백전 창덕궁과 창경궁도 관람함. 절대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성 암브로시오 “성인은 왕의홀도 왕후명령도 이세상 그누구도 겁내지않고 성당문 자물쇠를 굳게잠그어 잔혹한 황제에게 출입금했네” 위의 글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 성무일도 찬미가 중 일부이다. 절대권력 앞에 당당했던 성인. 더구나 잔혹한 황제에게 출입을 금하는 대범한 행동을 하셨다. 이러한 용기는 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성령의 은사와 믿음에 대한 확신이 그 바탕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잔혹한 황제가 성당에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잔혹하지는 않아도 흠 있는 권력자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성 암브로시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믿음과 학식, 성덕이 뛰어나지 않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지 않는가. 절대권력을 겁내지.. 계획 1. 확장 2. 행복 3. 성화 전의 상실 영화 에서 반란군에 초병이 무력하게 진압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전의를 상실한 듯 말이다. 손 쓸 틈도 없었지만. 아군이기에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배신과 배반에 초동 대등 또한 어려웠을 것 같다. 축구로 치면 1명이 배신을 하고 자책골을 무자비하게 넣는 경우다. 의도적으로 말이다. 당연히 인간은 이런 경우를 아주 싫어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그래서 지금의 문명을 이룩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상황은 과거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교육 순서 1. 전례 2. 교리 3. 성경 4. 영성 5. 기도 이전 1 2 3 4 5 6 7 8 ··· 10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