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420) 썸네일형 리스트형 마르 3,13-19_열두 제자를 뽑으심 마르코복음 3장 13절에서 19절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는 중요한 장면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로 구성되는 자신의 공동체를 모으고 싶어하셨다. 이를 위해서 그분은 "열둘"을 뽑으시고, 도처에서 그분께로 몰려드는 수많은 군중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게 된다.(3,7-12, 예수님의 활동 요약 비교) 이를 통하여 독자들은 그 열두 사람에 의해 기초가 형성되는 후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이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은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새로운 영적 "가족"의 일원이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공동체를 만드시는 작업을 하셨고, 첫째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중심으로 예수님.. 1월 23일 목요일,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분명 나 역시 큰 무리처럼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성경을 처음으로 제대로 읽으면서 말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신세계처럼 보였다. 소위 그분은 수퍼맨 같았다. 나에게 우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는 그분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따르고 있는가? ... 1월 21일 상황 파악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5-26) 안식일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준 율법이다. 그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제도이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마치 안식일을 하느님으로 절대화해서 숭배한다. 사람보다 안식일을 그 위에 둔다. 급기야 사람의 아들 보다 안식일을 그 위에 두는 우를 범한다. 이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안식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안식일일지라도 사람의 .. 1월 20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9-20) 때와 장소를 구분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경계가 모호할 때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혼인 예식과 장례는 단번에 구분이 된다. 그러나 혼인과 장례가 같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의 공생활은 혼인 잔치다. 그러나 혼인 잔치가 끝나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곧 있을 것이다. 비단 예수님 삶만이 아니라 현재는 기쁨과 슬픔, 고뇌가 공존하는 시대다. 지금이 어느 상황인지를 알면서 살아가야겠다고 묵상했다. 1월 18일 토요일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6)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즉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질문을 하기도 한다. 혹은 그냥 관심이 없다는 듯 '쿨'하게 지나친다. '왜' 그렇까는 질문은 유효함을 넘어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 적절한 말과 행동을 찾지 못하면서 계속 반박할 구실을 찾는 것은 어리석음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님 말씀이 아닌, 내 주관대로 예수님과 세상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1월 13일, 가족과 헤어짐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9-20) 제베대오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기존 인연과의 단절이다. 그것은 부모와 헤어지는 거,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는 거다. 이를 확장해서 보면 나에서도 벗어나는 거. 내 입장에서는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거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누군가와 이별을 한다. 부모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또 다른 연결을 준비한다. 그리고 완전한 연결은 주님 안에서 그것이 완성된다. 1월 6일 주님 병자들을 위해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4)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신 예수님. 주님께 청합니다. 아픈 이들을 위해서. 1월 5일(일) 주님 공현의 의미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시편 72,12-13) 주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 그리고 불쌍한 이들에게 나타나셨을까? 그들에게 동정을 베풀고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이전 1 ··· 47 48 49 50 51 52 5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