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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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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식사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 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 전례를 하고 나면 늘 고민이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공감이 가지만, 부활은 상상 이상이라 소위 감이 오지 않는다. 부활이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어도 그러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의 감성상 크리스마스가 더 감동적이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더 현실성이 있기에 부활 사건에 비하면 성탄과 사순이 더 느낌이 오는지 모르겠다. 부활은 아무리 해도 그런 느낌이 아닌 것이다. 부활은 소생하고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아팠다가 다시 나은 것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기에 부활은 감이 오지 않는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독서와 복음_양자역학과 하느님의 공통점!?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리처드 파인만, 1918-1988) 양자역학은 수학적으로 답이 나온다고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 물음은 과학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는 인간에게 던진 충격이기도 하다. 이해해야만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말이다. 위 영상에서 김상욱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에요." (양자역학이 아니라)" 오로지 문제는 인간에게 있다." "우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느님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다. 하느님이 계신 것이 확실하다. 그분은 인간에게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지 그분을 설명할 언어와 인간의 한계가 있을 뿐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구..
성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_"저는 아니겠지요?" 복음을 읽으면서 유다에 심리와 행동에 관하여 의문이 들었다. 1. 유다는 왜 갑자기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이었을까? 2.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계획이 있었는데, 다른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당신을 팔아넘기지는 않겠지요?" 하고 굳이 여쭈어 보았을까? 3.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계획이 이미 탄로가 났는데도, 왜 무모하게 그 계획을 시행했을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는 하느님만 아실 것이다. 다만 그 이후 그가 보인 행동을 보면,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과정에서 특이하게도 제자들의 부족한 부분이 한없이 드러나고 있다. 제자단의 으뜸이었던 베드로를 비롯해서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이 십자가 처형 때 숨어 있었..
성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님과 제자단 사이에는 긴장감이 돈다. 예수님의 폭탄 선언은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 명은 자신을 배신하고, 예수님이 이제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남았으며, 호언 장담하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는 예고를 예수님께서 하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 한다. 아드님이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방법을 이해하려면, 그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복기해 봐야 한다.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파스카를 말이다.
성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_잔인하지만 거룩한 주간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7 Forgiven by Daniel Gerhartz 복 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1 제 목: 잔인하지만 거룩한 주간 성주간이 어제 시작되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이스라엘 임금님, 높은 데서 호산나!"(따름 노래) 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해야 하지만, 코로나 19로 조용히 지나갔다. 예수님 오심을 맞이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하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이틀 전 사건이다. 참고로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도식은 아래와 같다.(12-19장) 1. 베타니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림 2. 임금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3.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옴. 예수님의 마지막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와 복음_기다림의 끝은 그분의 사랑 십자가 아래서_갓등 중창단 전례적으로 오늘부터 거룩한 주간이 시작된다. 그 시작은 예루살렘 입성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3년 간의 공생활의 종지부(?)를 찍으러 그곳에 가신다. 하느님의 때가 온 것이다. 수난과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짊어지기 위한 여정의 시간이다.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심신의 피로도가 쌓여만 간다. 묵묵히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제 신자 없이 사순 시기를 보내고 성주간 맞이하고, 신자 없이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려 한다. 목자 없는 양 떼가 아니라, 양 떼 없는 목자다. 더 나아가 어쩌면 목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시간까지 왔다. 이렇게 비유하면 불경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비슷하다. 아버지 하느님이 안 계신 것과 같은, 신성..
사순 제5주간 토요일_예수님께서도 '시청률'을 의식하셨다?!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예수님께서 '시청률'을 의식하셨다?! 모 TV 프로그램에서 사회자인 조세호 씨가 초대손님인 나영석 피디(1박 2일 제작)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출연진 섭외 기준이 무엇인지요?" 나 피디님은 "시청률" 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시청자를 의식하며 TV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물론 단순한 답변이고 이외에 수많은 고민을 할 거라 생각된다. 그런데 시청률을 의식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긍정적인 의미는 시청자를 배려해서 만든다는 것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는 윤리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자극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