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8,4)
용서에 관한 미담을 들으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이 앞선다. 나라면 못할 텐데. 대단하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을 보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아마도 용서가 거룩함의 영역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용서는 사랑의 높은 단계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어려운 일을 주님께서는 예화까지 언급하시면서 무한한 용서를 언급하신다.
아버지 하느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너 자신도 남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 용서 자체 없는 나라를 꿈꾸는 것은 무리인가. 용서할 일을 없는 세상 말이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세상이면 분명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의 이 질문.
그리고 일흔 일곱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답변.
행복과 불행 사이처럼, 예수님의 답변과 나의 삶은 오늘도 평행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