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음연구(마태 18,21-19,1)
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18,21-22)
일곱 : 전통적으로 ‘완전 또는 충만’을 의미한다.
일흔일곱 : 정확한 횟수가 아닌,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언제든 포용하라는 뜻.
2) 매정한 종의 비유(18,23-19,1)
앞단락(18,21-22)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예문.
주인이 자비를 베풀듯이 종들도 자비를 베풀라는 뜻.
2. 말씀묵상
부모는 다투고 있는 자녀들을 보면 어떻게 훈계를 할까요?
보통은 서로에게 양보하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형제끼리, 자매끼리, 남매끼리 다투는 것보다는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격투기 스포츠처럼 3분, 3라운드, 몇 날 몇 시에 싸운다고 예고하고 싸우나요?
아닙니다.
다툼은 시도 때도 없이, 예고 없이, 횟수도 미정이고 이유도 다양합니다.
물론 싸우지 않고 크는 자녀들도 있겠지만, 다투지 않고 자라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수없이 다투었기에 결국 원수가 되어서 지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다툼을 통해
자연스럽게 부모의 지도 아래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자랐던 것입니다.
자녀끼리만 다투는 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서 그러한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형제나 이웃에게 용서와 화해를 하면서
그 횟수를 세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동생을 100번 용서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동생을 용서합니다.”
곧 우리들 통념상 용서를 ‘횟수’로 생각하기 보다는 ‘행동’으로 받아들입니다.
마치 “나는 오늘 천 번 이상 숨을 쉬었다.” 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술을 마시면서 ‘잔’의 횟수를 세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를 횟수를 질문했을까요? 그 이유는 어제 복음과 연결해서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규범을 세우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에 대한 질문에 한계를 정하지 말라고 언제든 포용하며 매정한종의 비유를 통해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 매정한 종의 비유는 저희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라 하면서
받은 자비를 동료에게 비슷하게라도 적용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3. 실천사항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미 남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법을 배우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또는 자라고 나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심어 주신 ‘자비’를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자비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저희도 자비롭게 해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성경/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