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3,31-36
1. 복음 연구
요한 복음 3,31-36절이 누구의 말씀인지 분명하지 않다. 크게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27절에서부터 시작된 세례자 요한의 말씀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니코데모 대목 1-21절 다음으로 옮김)이고,
셋째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 이어지는 복음서 저자 자신의 묵상이다.
- 3장 전체의 결론이다.
31 하늘에서 오시는 분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다.
예수님이 계시하신 생명의 말씀은 지상에 속한 사람이나 제도로는 줄 수 없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아들은 다른 예언자와는 달리, 아버지 말씀 자체다.
예언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계시한다.
그분은 아버지의 말씀을 하실 때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전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들의 권위 있는 계시의 배경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자리한다.
두 분 사이의 사랑으로 인해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는 임무를 아들에게 맡기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아들의 계시에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낳는 반면, 계시에 대한 불신은 하느님의 진노를 자아낸다.
2. 복음 의미
구원과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결국 로고스 찬가부터 여기까지 '말씀'이 중심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시는 말씀의 육화에서 일어난다. 유다인들, 제자들, 성모님, 니코데모, 요한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말씀이 중심이 되었다. 하느님은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알리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구원과 단죄가 결정된다. 유다이즘에 뿌리를 내린 믿음, 곧 토라를 통한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로 충만하게 되었다. 이제 유다이즘의 세계를 뛰어넘어 온 세상을 향한 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
3. 복음 묵상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 하나가 고도화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가령, 동물이 사용하는 의사소통은 단순하고 본능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에 비하면 매우 정교하다. 그래서 다른 동물에 비해 협력과 협동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동물에 비해 고도화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다기보다 꾸준히 신장시켜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식사는 했니?"와 같은 짧은 대화은 쉽게 사용이 가능하지만, 철학적인 고차원적 의미를 알려줄 때는 사용되는 언어가 그 의미를 다 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어떠할까? 하느님은 '신'이다. 이렇게 말하면 끝날 수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상대방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곧 '신'에 관한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예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다. 몸에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요지는 한번 사서 먹어보면 효능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보다는 경험에 호소하는 광고였다. 그렇다면 하느님도 그렇게 설명이 가능할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번 믿어보면 안다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을 그렇게 체험하고 상대에게 전하고 성당에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셨다.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하느님 당신 자신을 알리셨고 증언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증언하셨다.
이제 그분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들었다면, 수용하고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둘 중 하나다. 아직 이해를 못했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거나.
참조: 정태현, 《요한 복음》,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