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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론

성주간 화요일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주님의 종 첫째 노래(42,1-9)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당신의 종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으며 조용히 세상에 공정을 펼치는 임무를 맡은 그 종을 당신께서 친히 선택하셨음을 우리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둘째 노래(49,1-7)에서는 종 자신이 먼 곳에 사는 민족들에게 말을 합니다.(예레미야 예언서의 표현이 나옴)

  - 첫째 노래는 하느님이 종을 보여주고, 둘째 노래는 그 종이 민족에게 말함

 

주님의 종은 예언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49,2) 만드셨다는 것은 그의 사명이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 어쩌면 제2이사야 자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49,3)

  - 종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은 '전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일부의 '충실한', '참된' 이스라엘일 수 있습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49,4)

종은 평탄하지 않는 길을 가는데, 종의 사명은 그런 길을 거쳐 가야 합니다.

  1) 종이 이스라엘인 경우

      이스라엘이 민족들의 빛이 되는 길은 강함과 부유함이 아니라, 아무 힘도 없는 민족이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일으켰기에 그러합니다.

  2) 종이 예언자인 경우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세상 모든 민족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데, 환영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없는 종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기에 그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노트 정리: ⟪이사야서 쉽게 읽기⟫, 174-182쪽


하느님의 방식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모든 게 다르지만, 그들과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입성 후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하셨고, 이 세상을 그렇게 우직하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특히 예언자들에게 그렇게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아도 방법을 변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방식은 모욕과 수모, 소송, 그리고 고발, 죽임까지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예언자의 몫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소근 수녀님께서 ⟪이사야서 쉽게 읽기⟫라는 책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정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사람들이 늘 좋아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내 말을 즐겨 듣는지 여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께 함께 계심을, 나를 의롭다 하심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부와 박해는 결코 피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으로 부르심 받는 것은 인간으로서 피하고 싶은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바라지 않아도 하느님의 명대로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가십니다. 하느님의 방식에 순응하시며 그 길을 앞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주님과 멀어져야 할까요? 아니면 베드로처럼 말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해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마음이라면 비록 주님을 모른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 그분께서는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베드로 너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참조: 요한 1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