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창세 1,1-19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한다.
복음 마르 6,53-56
겐네사렛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 찬미 예수님
어떤 일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면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 보면 쉬울 때도 있습니다. 재밌기도 합니다. 금방하면 더 잘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계속 하다 보면 처음 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을 경험합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성장을 한 것이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벽'을 느낀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을 하면 이러한 벽은 쉽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런 벽을 느낀 분야가 몇 개 있었고, 최근에는 더 많아집니다. 곧 할 줄 아는 게 0.1%이면 할 줄 모르는 게 나머지라고 여겨집니다.
올해가 사제수품 10주년인데, '강론' 쓰는 게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신학생 때는 정말로 강론을 쉽게 쓸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소위 노오력을 안 해서인지 '강론'이라는 게 어렵고, 특히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벽에 다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데, 주석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6장 56ㄴ절입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성경)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공동번역성서)
"과연 그분을 만지는 사람마다 구원받았다."(200주년 성서)
"and as many as touched it were healed."(New American Bible)
곧, 병자가 구원을 받은 것인가? 나은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새성경과 200주년 성서는 병이 나은 사람들을 구원받았다고 번역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동번역성서와 NAB는 나았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구원'에 관한 내용을 강론 주제로 삼고 쓰려고 했는데, 난관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관한 내용도 짧은 강론 시간에 다루기에는 매우 방대한 주제입니다.
병이 나았다고 하면, 병자 치유에 관한 내용으로 말씀드리려고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을 찾아보았지만, 오늘 복음과 연결되는 게 없었습니다.
이렇듯, 어떤 것에 관해 얼핏 보면 쉬운 것 같고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더 어려움에 다다르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삶도 비슷합니다. 희로애락이 있고, 학교에 가르쳐 준대로 살면 세상을 멋지게 살아갈 것만 같은데, 그러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수많은 병자들 역시 자신들이 그러한 질병으로 고통받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병에 걸린 것입니다. 오늘날은 의학이 발달해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중병은 고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린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병자를 신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현상적으로는 치유된 것이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새새명을 얻은 것이고, 구원을 받은 것이죠. 그들은 이제 세상을 이전과는 달리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천지창조처럼, 세상이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였을 것입니다. 비관적으로 보았던 삶을 희망적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과 하느님 없이는 안 된다는 것과 하느님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질병으로 처음에는 죽음을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치유된 이후로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병들지 않았기에, 하느님에 관해 덜 절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을 늘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병자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개 해 주십사고 청한' 이들의 믿음처럼 오늘도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며 시작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