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 희열을 느낀다. 높은 산을 등반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강도 높은 훈련, 스포츠 등을 보면 단순히 지금 나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향해서 분투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 대신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한다. 나는 예수님까지도 이렇게 여길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이는 예수님이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고백이다. 이러한 고백이 나온 배경은 그분께서는 말씀과 행적으로 기적을 보이셨고, 마침내 부활한 모습을 다수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극적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사람들은 그분의 인간됨에도 매료되지만, 신성에 더욱 기댄다. 예수님은 성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극복하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으로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에 '너무' 기댄 나머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말이다. 혹은 언젠가는 그분이 해 주시겠지. 그분께 의탁하는 것은 좋은 자세다. 그러나 그분은 내 삶을 대신 살아주시지 못한다. 함께하시고 응원해 주시고 도와주시지만, 그 모든 것을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이러한 고민에서 탈출하려면 예수님의 인성, 곧 그분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의 궤적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말이다. 그러면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보인다. 사랑, 성실, 온유, 절제, 순명, 기쁨, 평화 등등.
예수님은 신이지만 어렴풋이 갖고 있는 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의 신, 범신론의 신들, 무속 신.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너무' 신성 위주로 믿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균형 있게 바라보지 않고는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처럼 살아봐야겠다. 그래야 삶의 신비를 깊이 이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