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4,1-20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1-9) :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다
- 여러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4,10-12) :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라.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설명과 적용(4,13-20) : 선교
하느님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서 모임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신비에 싸여 있는 과정이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1-9)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은 한 농부가 갈릴래아 언덕 마을의 황폐하고 돌 많은 땅으로 나가 거기에 씨앗을 뿌리는 이야기다. 그렇게 씨를 뿌리는 중에 많은 씨앗이 길가나 돌밭, 혹은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져 유실된다. 단지 일부만이 좋은 토양에 떨어지는데 이것은 풍부한 결실을 가져온다.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뿌리고 난 후에야 땅을 가는 식으로 해서 씨앗을 땅에 갈아 묻었다.
그러면 이 비유가 담고 있는 각별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비유는 수확을 거두는 것으로 끝낸다. 그럼으로써 기쁨에 찬 보증을 제공하고 있다. 곧 예수님의 선포 활동은 성공하고, 시작은 성취를 약속하고 있다. “씨앗”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많은 결실을 가져온다.
2. 여러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4,10-12)
이 단락은 가까운 이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고 있다.
여기서 질문하는 당사자는 확실히 후기 공동체로서,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은밀하게’ 가르쳐 주시는 대목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공동체에 적합하게 해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믿음을 지닌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 활동 가운데 그분께 가까이 있음을 말해 준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하나의 사실로 되어 있다. 즉 씨가 뿌려지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것이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이 비밀을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코에 따르면, 바깥 사람들이 보이는 배타적인 태도는 의도적으로 나타난다. 즉 “그들은 실제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무딘 마음”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설교에 대해 마음을 닫은 채로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무딘 마음은 죄이며, 현세적인 벌이기도 하다.
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설명과 적용(4,13-20)
제자들에게 주어진 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이 설명은, 사실상 초대 교회가 신앙으로 회개한 사람들과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거기에 나타나 있는 언어 표현 형태와 전제 조건들(환난과 박해, 세상의 유혹)로부터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이것의 원럐 관점(씨 뿌리는 것과 수확하는 것)이 특이하게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쪽으로 옮겨져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이제는 그 사람들이 뿌려지는 것이 되어서 이 세상의 상황에 던져지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말씀이 뿌려지는 “땅”이기도 하다(15절). 이 두 은유적 표현이 뒤섞여 있는 표현상의 어색함은 듣는 이들에게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그들로 하여금 결실을 맺으라고 권유하려는 의도에서 생긴 것이다.
선교를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본문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적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씨 뿌리는 사업을 이어받아 계속해 나가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를 위한 통찰력과 위로를 받는다. 이 비유에서 세 가지 상황에서 뿌려진 씨는 유실되고, 다만 4분의 1만이 좋은 땅에 떨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경륜의 신비를 암시해 주고 있다. 하느님은 많은 적대자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어 결국에는 풍부한 결실을 거두신다. 그분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른 법칙으로 일하시는데, 여기에 나약함 속에서 나타나는 하느님 힘의 역설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