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예레 17,5-10
예레미야 예언자는 저주 받는 이와 복 받는 이를 구분해서 전한다.
복음 :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오늘 복음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능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동물은 선과 악이 없지만, 인간은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이 있기에 이를 분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 권한은 당연히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러기에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예레 17,5-7)
복음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이야기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오늘날로 보면 특별히 잘못한 게 없어 보인다.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다움을 포기하였다. 그가 동물이었다면 잘못이 없었겠지만, 인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이기를 망각한 것이다. 어떻게 종기투성이의 사람이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데 모르척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를 도와줄 능력이 차고 넘쳤는데 말이다. 그를 도와준다고 해서 그에게 어떤 해가 돌아갈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부자는 죽고 나서 나온다. 아브라함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그제야 그는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이 라자로처럼 고통을 겪은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된다. 마치 완고한 이가 심하게 앓게 된 후 변화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죽은 뒤에는 늦었다. 다시 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은 뒤에 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치 사람을 죽인 뒤에 '미안해'하는 것과 같다. 죽은 뒤에 깨닫는 것은 늦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회개해야 한다. 주님께서 시간을 주실 때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죽은 뒤에 부자는 깨닫게 되고, 이제서야 남은 형제들을 걱정한다. 문제는 부자가 생각하기에 그들 또한 자기처럼 회개하지 않을 것이기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 한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인간을 정확하게 보고 하는 말이다. 겁주는 게 아니라, 심리학에서 인간을 심리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한다.
나는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정말 나는 회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한다. 아직도 주변에 '라자로'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많다. 세상 곳곳에도 있다. 소식을 듣고는 내 일 아니라고 모르척하기 일쑤다. 오늘 사순 실천은 "아픈 이를 위해 묵주기도5단 바치기'다. 성모님께 전구하며 나는 어려운 이들을 꾸준히 도와줄 수 있도록 마음을 계속 열어놔야겠다.
나도 그런 부자와 같은 태도가 있기에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너는 그러지 마라 라는 주님의 소리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