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다니 3.25.34-43
아자르야는 불 위에서 이스라엘 선조와의 계약을 말하면서 주님께 자비를 청한다.
죄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회개한 모습을 보시고, 살려달라고 한다.
복음 : 마태 18,21-35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를 말씀하신다.
독서는 용서를 청하는 이의 모습을, 복음은 용서를 하는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자르야는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우상 숭배를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불가마에 던져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불가마 속에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살아남아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바빌론 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다."(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5월호, 이석규)
복음에서는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임금과 백 데나리온도 받으려는 무자비한 종이 나온다. 그 둘은 용서에 있어서 매우 대조적이다. 임금은 한없이 자비로웠지만, 임금의 자비를 입은 종은 매우 야박했다. 임금의 뜻은 자기처럼 종이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모습으로 끝이 나지만, 신약에서는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까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녀들도 자비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용서가 이어져야 함을 말한다. 하느님께 용서를 받은 만큼 다른 이를 용서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내가 용서받는 것을 기억하는 것과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 이 둘은 실상 간단하지 않다. 양보조차도 어려울 때가 많다. 운전에서 보면 양보 운전이 얼마나 어려운가! 이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한다.
용서보다는 이처럼 정말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배려하고, 친절하고, 받아주고, 참아주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연민과 연대하는 것 등등. 작은 실천이 쌓이면 정말 '용서'라는 큰 산을 마주할 때 그래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형제를 용서하기 위해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평소에 다스리며 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