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히브 7,25-8,6
죄를 용서받기 위해 대사제는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일단 죄가 없으시기에 백성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는 한 번만 제물을 바치시면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다.
복음 마르 3,7-12
사방팔방에서 호숫가에 계신 예수님을 보러 큰 무리가 몰려왔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거룻배에 오르신다.
군중과 병자들이 몰려와 당신을 밀쳐내는 일이 없게 하려고 제자들에게 그러한 지시를 내리신다.
또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말은 중단하라고 이르신다.
그 말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이다.
오늘 복음을 두고 두 교부, 즉 크리스소토무스 성인은 "은총을 받은 이는 예수님께 다가가기 위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동시에 자신의 노력만으로 은총을 얻는 사람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신약성경주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손으로 예수님을 만지는 것보다 신앙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같은 책)
이 두 교부가 본 공통점은 '신앙'입니다. 다른 말로는 '응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내 노력만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오산입니다. 여기서 내 노력이란 내가 기도 많이 하고 주일 미사 참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거야 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그분께서는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해." 하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이미 주셨고, 더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강도처럼 그분께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면 '응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맞는 건가요? 하며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면 안 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다면, 세상에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신앙, 곧 응답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복음의 상황을 관상해 보면,
사방에서 믿음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그저 만져서 나으려는 부류,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악령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이 연상됩니다.
남을 돌보지 않으면서 자신만 구원받기 원하는 이기적인 신앙인들
악령처럼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경외심을 갖지만, 어려운 이웃의 도움을 외면하는 신앙인들.
잠시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총을 어떻게 돌려 드리고 있는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이제 내 안에 오실 예수님께 앞으로 어떻게 돌려드려야 할지 다짐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