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론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근래 들어 주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주식이 소위 대중화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점점 그 경향이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저금리 시대에 각자가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겠죠. 그런데 주식과 관련해서 이런 말들을 하고는 합니다.  

"그 주식이 대박이 났다고 하는데, 사둘 걸." "오를 줄 알고 주식을 샀는데 많이 떨어졌어."

  주식 시장은 전문가조차도 확실하게 예측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오를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항상 오르는 주식은 없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시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그 불확실성에서 가능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를 가능성이 있는 주식을 매수합니다. 그 가능성을 위해서 때로는 냉철한 분석을 합니다. 그러나 냉철한 분석만으로 안 되는 게 주식이고, 그 원인으로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은 어떠할까요? 마치 주식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믿으면 무언가 잘 될 것 같기도 하고. 곧 사람의 심리가 다분히 작용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도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가령, 냉담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주식과 신앙이 다른 점은 신앙은 진리, 진실의 차원을 다루고 있는 점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처음과 끝을 다루고 있습니다.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드러나게 되면 무언가 보상을 받는데, 차고 넘치도록 상이 주어진다는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것은 주식이 오른다는 믿음과 비슷하지만 차원은 다른 것입니다. 만약 신앙의 속성을 주식과  비슷하게 이해했다면 복음에 나오는 비유 이야기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현실에서는 주식이 많고 적음이 일종의 기쁨과 슬픔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세상 종말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가 그 기준이 됩니다. 곧, 선을 행하면 상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게 된다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1년간 우리나라는 코로나 19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종교 단체'라는 범주로 일부 개신교에서 감염 예방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 국민들의 시선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의 행태도 걱정이지만, 국민들이 그들로 인해 도매급으로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까 봐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이어서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비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자기식대로 맹목적으로 맹신적으로 믿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들을 귀'에 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일부 개신교처럼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우스꽝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희가 기념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지성과 성덕의 등불이 됩니다.

 

성 토마스 찬미가의 마지막 구절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