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노폴리스의 팔라디우스(364/65-431년 이전) 주교는 오늘 복음을 주해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척도는 단식을 하느냐 마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기준이 된다고 한다. 즉, 적당히 먹고 마시느냐, 아니면 지나치게 많이 먹고 마시느냐가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저는 이와 같은 견해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단식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음 글은 어느 블로그에 있는 글인데요.
<교사를 위한 교육학 강의>라는 책 관한 내용입니다.
저는 예언직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까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데, 마침 그와 관련된 글이 있어서 찬찬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점은 제가 가진 기존 생각과는 다르게 접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르치는 데 있어서 먼저 비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인권, 노동, 평화 등의 가치 중심적인 교육이 필요하고,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성 회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적의식적인 학습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결국은 우리가 받아온 교육의 관점에 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단식논쟁은 '단식' 자체를 편협하게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거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주기적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의무였고, 속죄와 간구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식은 유다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종교 행위였기에 몸가짐을 가다듬은 상태에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이를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지는 상황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면서, 현재 단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서도 단식을 할 태세였던 것입니다. 수단과 목적에 관해 이해가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단식'이 필요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교회는 단식을 공식적으로 일 년에 두 번 권하고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입니다. 단식은 아니지만 금요일마다 금육을 지키라고 합니다.
복음은 단식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알려주신 거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복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팔라디우스 주교님이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의무와 금지 조항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나에게 맞게 조절해서 어떻게 하면 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을지를 적용하는 것이 그 척도여야 합니다. 마치 나는 단식하고 주일 미사를 참례했으니, 나는 의무를 다하고 있기에 거기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새로워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새롭게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잘못된 습관이 있으면 고치고, 비우고 깨끗이 해서 그곳에 주님의 가르침으로 채우고, 그 가르침을 어떻게 하면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궁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합니다. 단순히 반복되는 의무만이 아니라, 교회가 권장하는 의무의 의미를 기억하며 실천할 때 새로움이 담긴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