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우리가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을 영적 표상과 연결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27쪽)
자명종 소리를 예수님 소리라고 생각하고 아침에 기쁘게 일어났습니다.
자명종 소리를 영적 표상으로 이해하는 발상이 참신하고, 앞으로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부활의 신비 = 되살아남 = 자명종 소리를 듣고 깨어남 = 부활의 신비를 기억함
#2일차
"... 오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말을 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거나 강요하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일어서게 하는 말, 희망과 신뢰의 말, 화해의 말, 사랑의 말, 치유의 말을 하겠다고 결심해 봅니다."(36쪽)
이를 딲으면서 내 언어를 성찰해 봅니다. 고운 말 사용해 보자고 다짐해 봅니다.
#3일차
각 장의 첫 문장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일은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을 결정합니다."
"차를 몰다 보면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작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작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위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항상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상적인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겹다고 여깁니다."
첫 문장부터 공감가는 말로 시작하는 그륀 신부님의 통찰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위에 밑줄 친 문장을 보면서 '책산행'을 함께 하고 있는 분들 역시 떠오릅니다.
'책산행'이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시기를 그저 바랄뿐입니다.
#4일차
'나는 옥좌에 앉아 있다. 나는 나의 욕구나 격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다스린다. 나는 내 옥좌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와, 지금 어좌에 앉아 계신 분(묵시 5,13)과 함께 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미사 중에도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 위와 같이 연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19로 성당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졌어요.
미사 후에 성당에 앉아 있으면 많은 것들이 해결되고, 기분도 좋아지고 했는데 말이죠.
#5일차
"'보다'에 해당하는 동사 가운데 '테아스타이'가 있는데, '신(하느님)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오스'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분입니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신(하느님)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110쪽)
고대 그리스어에서 신(하느님)의 어원이 '보다'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신은 명사이므로 '신이 우리를 본다.'를 뜻할 수 있습니다. 신이 우리를 관찰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뵙는 것을 최종 목표라고 하기에, 하느님은 우리 측면에서는 꼭 뵈야 하는 분이 됩니다. 그러므로 직접 뵈옵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서 뵙는 것을 희망하고, 단어의 어원의 의미대로 여기서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6일차
"'보다'에 해당하는 동사 가운데 '테아스타이'가 있는데, '신(하느님)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오스'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분입니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신(하느님)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110쪽)
고대 그리스어에서 신(하느님)의 어원이 '보다'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신은 명사이므로 '신이 우리를 본다.'를 뜻할 수 있습니다. 신이 우리를 관찰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뵙는 것을 최종 목표라고 하기에, 하느님은 우리 측면에서는 꼭 뵈야 하는 분이 됩니다. 직접 뵈옵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서 뵙고, 여기서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7일차
"사람들이 그 빵을 달라고 청하자, ...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139쪽)
어제는 두 번째로 노숙인들에게 간식을 전달하는 봉사를 하러 갔습니다.
처음 때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말도 잘 건낼 수 있었고, 더 상냥하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면 이렇게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밥'입니까?
그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저 역시도 매우 허기진 상태에서 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저는 봉사 끝나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그분들은 그러지 못한 상태입니다.
매일 먹는 '밥'
매일 먹을 수 있는 '밥'
누군가는 그 기적이 아직도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
#8일차
아버지가 아들에게 왜 항상 숲에 가느냐고 물었다.
"하느님을 찾으러 가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지 않니?"
"물론이죠. 하지만 제가 어디에나 다 있는 건 아니잖아요."
-엘리 위젤(미국의 유다인 작가)
저는 하느님이나 저나 어디에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저는 어디에나 있지 않는 것이죠.
제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
제가 있는 곳, 저를 만날 수 있는 장소로 가야겠습니다.
#9일차
"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이 도시 사람들 안에서, 도시의 '스모그' 한가운데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176쪽)
점심 때쯤 명동 성당에 가면, 사람들이 군데군데에 앉아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숨막힐 것 같은 도시 한복판, 그리고 번화한 명동에서 그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10일차
"눈은 부드러운 이불처럼 보입니다."(198쪽)
지리산 등반할 때 친구가 '하늘을 이불을 삼는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머리둘 곳도 없으신 예수님 생각도 나면서, 참 감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눈을 이불로 표현하네요.
저는 '이불'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루를 마치고 이불 속에 들어가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순간이기 때문이죠.
무엇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은 참으로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부드러운 이불처럼 누군가를 덮고 품어야 할 텐데.
#11일차
"친구는 우리 마음의 멜로디를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멜로디를 잊었을 때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노래 불러 주는 사람입니다."
(223-224쪽)
내 마음의 멜로디를 듣는 친구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는 그런 친구인가를 생각해 성찰해 봅니다.
"우정은 가꿔야 한는 것"이라고 하네요.
마음을 열고 친구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12일차
"활동과 기도가 번갈아 이어져야
내적 활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256쪽)
'활동'과 '기도', 이 둘의 적절한 조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활동 위주로만 하면 지치거나 공허해지기 마련이고,
기도 위주로만 하면 내적 긴장을 잃게 되고 공허해집니다.
오늘 자모들과 오랜만에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기도를 바치면서 힘을 얻는 느낌이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책 읽고.
덕분에 저는 행복합니다.
#13일차
"병은 우리에게 '나'라는 인간의 기본 상태, 즉 약함을 보게 합니다. 병은 우리를 다그치며 자문하게 합니다. '나는 실제로 누구인가? 나는 성공한 사람, 늘 건강한 사람에 불과한가? 나의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가? 누가 병든 사람인가?'"(274쪽)
'병도 삶의 일부'라는 것, 병은 패배가 아니라는 것. 병의 긍정적인 면과 병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와 관계된 세상을 어떻게 하느님과 연결시킬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이것을 '영적 삶의 기술'이라고 부릅니다(288쪽). 이 기술은 세 가지 코드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여유', '의식', '침묵'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하면 '관심'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 수렴되게 만드는 이 기술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신기하게도 쉽게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이 우리 본성과 사물 안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이겠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총'에 따른 삶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해야 될 것 같아요. '기적'이라는 단어를 말이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총'의 따름 삶이며 '기적'과도 같은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