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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묵상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1-14)

 

[말씀 연구]

-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느님이 종말의 날에 마련해 주시는 잔치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상이다.

- 일반적으로 임금의 초대에 특별한 사유 없이 응하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기에 비유라기보다 우화다.

-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초대'에 초점을 맞추신다.

-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을 재차 보내신다는 우화로 발전했을 것이다.

- 교회는 악인들과 선인들을 모두 신앙으로 데려오지만, 모두의 삶을 변화시켜 영적인 은총의 자유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대그레고리우스)

- 혼인 예복: 아버지의 뜻에 순종, 사랑(대그레고리우스), 의로움의 옷(아우구스티누스)

- 성경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모두 참석하는 잔치와 악인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잔치에 대해서 알려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참고문헌]

이우식, <마태오복음>, 바오로딸


 

왜 비유에서 우화로 발전했을까?

비유는 초대이고 우화는 판결과 심판이 내용을 이룬다.

호의에서 진노로 변하고 그 진노 후 엄격해졌다.

 

상황을 유추해 보면, 초기에는 예수님의 초대에 대부분이 즉각 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니까. 왕심장이 아니고 하느님이 앞에 계시는데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음이 완고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보고 했던 사람들 중 당시 완고한 사람 아닌 이상 예수님의 부르심에 쫓아갔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공연 기획 관련 사람이 BTS가 나와 함께 일하자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메시가 축구 가르쳐 준다고 하면 어떠한가? 유명 인사가 초대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의 경우 주교님이나 교황님이 부르신다면 노래 소절처럼 '언제든지 달려갈 거야~'.

그런데 시간이 흘러 예수님은 재림할 기미는 안 보이고, 아프고 힘들고 했을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만이 생겼을 것이다. 이러려고 내가 예수님 따라다녔나 하고 회의나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급기야는 시간이 더 흘러서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한 마디로 처음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 된 것이다. 순수하고 순진하고 순종적이며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재정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대로 두다가는 수위가 높아져서 댐이 무너지듯이, 공동체 존립에 위기가 온 것이다. 질서를 바로 잡을 시기가 온 것이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서 초대에서 심판으로, 호의에서 엄격함으로 메시지의 초점이 이동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혼인 예복(순종, 사랑, 의로움)으로 초대된 혼인 잔치에서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카스파 루이켄의 혼인 잔치의 비유

카스파 루이켄의 혼인 잔치의 비유

photo.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