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
요한 서간들이 작성되던 시기에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었다. 갈등이나 박해보다도, 그릇된 가르침이다(1요한 2,19). 저자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절), "거짓 예언자"(1요한 4,1), "속이는 자"(2요한 7절)라 부른다.
식별의 기준
교리 시험을 보는데, 문항이 오천 개다. 그러면 한 개도 틀리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세세한 것까지 알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몇 개까지를 봐 줄 수 있을까?(100점 만점에 70점?) 올바른 신앙과 올바르지 않은 신앙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진리 안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몇 가지 주의할 점을 일러준다.
첫째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속한 영이 아니다(1요한 4,2).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인간인 예수를 구분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 때에 인간 예수와 신적 존재인 그리스도가 결합되었다는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하느님이신 바로 그분이 참으로 인간이 되셨음을 역설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요한 복음의 증언이 떠오른다.
둘째로, 어떤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거짓말이며 진리가 아니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영지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이지만, '하느님을 안다'는 표현에서는 영지주의적인 경향이 감지된다. 영지주의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했으므로, 하느님을 아는 것을 중시하고 계명이나 죄와 같은 문제는 구원을 위하여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거서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6)라고 말한다.
셋째로, 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을 모두 받아들이지 말고 그 영을 식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1요한 4,1). 위에서 말한 기준들에 따라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을 구별해야 한다.
열성적인 신자라고 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관념 속에 그리스도교 교리가 아닌 잘못된 교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믿고 있을 수도 있다.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난다는 요한 1서의 말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신앙에는 늘 식별이 필요하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저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라고 선언한다. 어쩌면 이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안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의 입을 막는 선언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줄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1요한 3,19)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퍼뜨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주장은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저자는 편지를 읽는 신자들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고한다. 그 사랑은 단순한 인간적 감정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1요한 4,12)되는 것이기에 사랑의 실천은 중요하다.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인간적인 애정으로 내 마음에 드는 이들을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가?
그렇게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가 진리 안에 머물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조: 안소근, 신약 종주, 274-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