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론 초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2-30
성전 봉헌 축제?
[성경 속의 인물] 하누카(성전 봉헌축제)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하누카’ 기록이다. 이렇듯 예수님 시대에도 봉헌축제는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 축제를 하누카(Hanukkah)라 불렀다. 직역하면 봉헌(奉獻)이란 뜻이다.
그들은 봉헌축제를 ‘키슬레우 달’ 25일부터 8일간 지냈다. 양력으로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해당된다. 축제 첫날에는 ‘하누카 촛대’라 불리는 독특한 장식에 촛불을 켠다. 그런데 첫날은 한 자루만 켜고 이튿날은 두 자루를 켜고 이런 식으로 8일 동안 차례로 불을 붙인다. 유다인의 불길이 그렇게 퍼져나감을 기원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성탄절을 지키지 않기에 하누카 촛대에 많은 장식을 해왔다.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촛대를 장식했던 것이다.
하누카 축제는 마카베오 독립운동과 연관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희랍의 지배를 받았고 임금은 ‘에피파네스’라 불린 안티오코스 4세다. 그는 희랍문화를 심는다는 구실로 유다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할례와 안식일을 금지시켰고 율법서를 불태우며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게 했다. 어기면 사형이었다. 기원전 167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억지로 참배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유다인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것이 마카베오 독립운동의 시작이다.
에피파네스는 군사들을 보내 반란을 진압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의 주력부대는 인근의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성전에 세워진 제우스 상을 제거하며 이단자들을 몰아냈다. 기원전 164년 12월의 일이다. 그는 제단을 다시 만들고 율법에 따른 감사의 제사를 바쳤다. 그리고 이날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기로 했다. 이것이 ‘성전 봉헌축제’의 유래다(2마카 10,8). 개신교에서는 수전절(修殿節)이라 번역했다. 성전을 정화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용어다.
전승에 의하면 성전을 탈환한 마카베오는 제단의 등잔대(Menorah)에 불을 밝히려했다. 그런데 기름이 하루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기름이나 사용할 수는 없었다.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이 승인한 기름만이 가능했다. 그런데 하루 분량의 기름이 8일간 불을 밝히며 타올랐다고 한다. 유다인들은 이를 기적으로 여기며 8개의 등잔이 달린 메노라(등잔대)를 만들고 8일간 기념했던 것이다. 이후 기름대신 초를 사용하면서 하누카 촛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2011년 4월 3일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유다인들의 질문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예수님 대답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핵심 문장을 뒷바침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핵심 문장
0. 어린이날을 맞아서 어른이 해야 할 역할
찬미 예수님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 날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19 사태로 학부모나 조부모도 고생이지만, 정말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그러지 못한 오늘날 어린이들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합니다. 비유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릴 때 동네에서 동생, 친구, 형들하고 원 없이 놀았던 게 지금 생각해 보면 행복했던 같아요. 매일 밖에서 뛰어놀고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던 것이 정말로 좋았는데, 지금 우리 어린이들은 그러한 환경이 되지 않아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어린이 날을 맞아서 어린이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어른들이 연구하고 그러한 환경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1. 복음의 내용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로 반대되는 사람으로 삯꾼이 있습니다. 삯꾼의 내용을 들으면 착한 목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부각이 됩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삯꾼은 양의 안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존재입니다. 이에 20절을 보면 유다인들의 반응 중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마귀가 들려 미쳤소.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듣고들 있소?"
그런 뒤 오늘 복음에서처럼 시간과 장소가 변경됩니다. 시간은 성전 봉헌 축제이고, 장소는 솔로몬 주랑이 됩니다. 하지만 토론의 상대자와 주제는 그대로입니다. 상대자는 유다인들이고 주제는 예수님은 과연 메시아인가 아니면 가짜인가?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단계인 그리스도를 전하고 따르는 것은 많이 더딜 수 있습니다. 늘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복음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와서 보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비슷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미 말하고 보여주고 했지만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2. 봉헌절의 의미의 완성은 예수님(신은근, 정태현 글 참조)
그런데 이 말씀은 성전 봉헌 축제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전이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낸다는 봉헌절의 의미는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완성됩니다."(요한 복음, 정태현)
성전 봉헌 축제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마카베오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고, 이 독립운동은 종교 박해에 대한 저항운동이며, 성전 정화 운동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 봉헌절을 거행하면서 유다인들은 성전을 자신들이 다시 축성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합니다. 성전의 재축성은 그들이 하느님에게 속해 있고 하느님도 그들에게 속해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는 외적 표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믿는 이를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과도 직접 묶어 준다고 주장하십니다.
3.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는 의미(같은 책 인용)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유다인들은 당신 백성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하기 위하여 더 이상 시온 산에 세워진 성전 건물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 앞에 서 계신 당신이야말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하느님의 가시적 현존이라고 주장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의 약속의 성취이며 완전한 사랑과 순종에 바탕을 둔 일치를 말합니다.(요한 1,14 참조)
4. 예수님과 하나됨을 위하여
복음을 읽으면서 이기적일 수 있지만 이 말씀이 저와 무슨 상관인가를 고민해 봅니다. 그러면 딱히 성전 봉헌 축제니, 봉헌절의 완성이 삼위일체이니 하는 것이 와 닿지 않게 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리는 어린이 날이 어른들인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밉상이기는 하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예수 당신은 누구요?"라고 말입니다. 최소한 그들은 하느님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알려고 하고 흠숭하려고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불행히도 예수님은 몰라보았지만 하느님 아버지가 말씀하신 메시아에 관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성전에 관해서 관심과 경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믿는 상황에서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쫓고 있는지, 달리 말하면, 그분의 기쁨 속에서, 행복 속에서, 평화 속에서, 사랑 안에서 충만하게 보내고 있는지 비추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믿는 상황에서 그만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를 노력하고 있는지, 달리 말하면, 그분의 기쁨 속에서, 행복 속에서, 평화 속에서, 사랑 안에서 충만하게 보내고 있는지 비추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