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여서 묵상하기가 쉽지 않다. 독서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다룬다. 당신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어 주시고 가나안 땅 전체를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약속하신다. 계약은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다. 이 계약의 기간은 영원하다. 복음은 그 계약이 완성되는 때를 맞이하고 있다. 영원한 계약, 곧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와 있다. 이 순간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영원한 계약이 완성되려면 계약을 완전하게 지킨 이여야만 가능하다. 하느님이 세운 계약은 사실 하느님만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정대로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필연적으로 파견했어야만 이 계약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당연히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태어난 시기가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말씀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한 것은 첫째, 하느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공상과학적인 생각인데, 우리가 뇌를 스캔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스캔받은 이는 스캔된 이와 동일한 사고가 가능하게 된다. 서로 같아진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하느님)를 완전히 알고 또 그분 말씀을 지키기 때문에(삼위일체) 생물학적으로는 아브라함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전지전능한 하느님 아버지처럼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한 경험을 알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게 쉽게 설명이 되지만, 한번 논리적으로 접근을 해 보았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신실하신 하느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 죽음에서 해방시켜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 준다. 하느님은 이토록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영원성을 선물로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자꾸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영원한 상속에 관심이 없을까. 혹은 말씀은 따르지 않고 선물만 받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없는지 나의 더러운 죄를 돌아본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