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예수님께서 '시청률'을 의식하셨다?!
모 TV 프로그램에서 사회자인 조세호 씨가 초대손님인 나영석 피디(1박 2일 제작)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출연진 섭외 기준이 무엇인지요?"
나 피디님은
"시청률"
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시청자를 의식하며 TV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물론 단순한 답변이고 이외에 수많은 고민을 할 거라 생각된다.
그런데 시청률을 의식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긍정적인 의미는 시청자를 배려해서 만든다는 것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는 윤리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해서 세간의 이목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보고,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 출연진을 섭외하는 것이 꼭 짚어서 '시청률'로만 기준을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갑자기 '매일복음묵상'에 시청률을 서두에 꺼낸 이유는 나 역시 '인기'를, '관심'을 받기 위한 마음이 있다가 아니고, 에제키엘 예언자와 예수님 또한 '시청률 의식'처럼,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리기 위해서 당신들만의 방법을 사용한 게 아닌가 싶어서다. 언뜻보면, 둘 다 남의 시선에 상관없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분 모두 당대의 사람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 시대에 맞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박식한 신학자이면서, 열정을 지닌 사목자였는데, 그는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개인에게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존 예언자들이 공동체에만 강조를 두었다면, 에제키엘 예언자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개인에게도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소위 '시청률'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에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본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으로 군중을 살피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 떼처럼 느껴지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에 대한 애정을 지니셨다. 그들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너무나 많았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사람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이다. 강생 하신 것 자체가 그 관심의 끝을 보여주신 거라 생각한다.
이제 앞으로 성주간은 다소 불경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높은 '시청률'(사랑)을 시기한 이들의 음모론이 전개된다. 예수님 당신만의 방법이 그들에게는 꽤나 불편했던 것 같다(그들 입장에서는 신성 모독이었으니). 온전히 시청률의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의 방식은 모험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그 모험에 예전부터 매료가 되었다. 이제 나도 예수님처럼, '시청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