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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론

부활 제6주간 수요일

+ 찬미 예수님

 

오늘 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이와 비슷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들의 대단한 종교심을 치켜세워 주며,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그 신은 창조주로 어디에나 계시며, 전능하신 분이며, 인류에게 생명과 숨을 불어넣어주시는 분이며,

계절과 땅의 경계를 정하셔서 사람들이 당신을 찾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그분 안에서 생활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서 금과 은과 돌로 만든 신상을 신으로 섬기지 말고 하느님을 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의 부활을 통하여 세상 심판의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에서 복음선포가 아네테 시민들에게 그다지 큰 호응을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어고 그들 가운데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이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의 다름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의 연설은  그분이 이교인들에게 한 설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합니다.(매일미사 참조)

그런데 생각보다 성과(?)가 없어 보입니다. 생각만큼 많은 이들이 회개해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죠.

마치 열심히 하고 잘 했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었는데도 사람들의 반응이 냉랭한 경우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그들 중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였다고 하고, 고위층 인사인 디오니시오와 다마리스라는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심리 실험을 방송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토론을 하면 상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더 반대편에 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실험 전에 저는 토론을 하면 납득하고 이해하면 승복하고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순수한(?) 생각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상대 의견이 틀리고 내 의견이 맞다는 것으로 더 강화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철학으로 토론 문화가 한창 꽃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육신의 부활이라는 이야기는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서 그들과 토론하며 그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 줍니다.

비록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몇몇 사람은 믿게 됩니다.

 

저는 예비 신자들을 모집하면, 이런 걱정이 앞섭니다. 과연 몇 분이 오실까?

그런데 성령께서는 제가 생각한 수보다 더 많은 이들을 보내주십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설교했던 아테네처럼,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무지와 거부감을 넘어 무관심 또는 조롱거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수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내주신 성령께 감사드리고, 우리에게 온 새 신자들을 환대하며, 복음을 삶으로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