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헬 1,2-11; 루카 9,7-9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관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존재입니다.
코헬렛의 어조는 세상이 매우 무상하다고 합니다. 세상이 덧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덧없는 세상이 의미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다르게 보입니다. 어느 과학자는 우주가 의미가 있는 것은 우주를 관찰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관찰하는 이가 없다면 우주의 존재는 오늘 코헬렛의 말씀처럼, 허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이 계시다면 얼마나 더 의미가 있겠습니까?
복음 또한 이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자신에게 고언을 했던 세례자 요한을 베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인물이 나타난 것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그는 잘못을 하였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과 비슷한 인물의 등장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덮고 싶은 심정에서 세례자 요한과 비슷한 인물인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예수님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화요일 저녁 강의에서 이충렬 작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께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에게 한 말씀이었습니다. 만유지상, 막비주명, 위주광영, 사주구령입니다.
만유지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위에 천주님을 모시는 것이고
막비주명은 천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천주님의 말씀과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고
위주광영은 우리의 모든 것을 천주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사주구령은 오직 천주를 섬기고 천주님으로부터 영혼을 구원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128쪽>)
간단하게 이 네 가지는 지극한 천주사랑, 철저한 천주사랑, 온전한 천주사랑, 천주를 공경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헤로데 영주처럼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처럼 눈으로 봐야 믿겠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한 하느님 존재를 망각하고 세상을 탐하고, 무질서하게 살지 않습니다. 곧 죄에 빠져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과연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반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순히 하느님 존재만 믿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가슴에 품었던 지극한 철저한 온전한 천주사랑과 천주공경을 본받아 우리 또한 가슴에 품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저자
- 이충렬
- 출판
- 김영사
- 출판일
- 202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