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히브 12,4-7.11-15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 하느님께서도 히브리 신자들을 대한다고 한다. 그러니 시련이라는 훈육과 책망을 견디어 내라고 한다. 또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라고 한다.
복음 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더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이 오늘 복음에서 일어납니다. 눈앞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그들은 '나름' 이성적인 추론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리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있으신 것은 인정하지만, 무슨 노력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게서 부여 받은 것이라고 단정 짓고 판단합니다. 은연중에 나도 저런 능력을 부여받으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놀라시지만 묵묵히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에 가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병자들은 고쳐주십니다.
예전에 개그 코미디에서 불만이 많은 사람을 풍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행어가 '나만 불편해'였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디 불편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만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개그이기 때문에 과장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 저 정도의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겠다는 씁쓸함이 있었습니다. 합리적인 의심과 추론이 때로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의심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까지 힘들게 합니다. 의처증, 의부증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이나 교리에 관하여 불편하거나 불만이 있었던 적은 없었을까요? 자신의 생각으로 하느님을 판단한 적은 없었을까요?
그런데 다행인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체를 두고 '보고 맛보고 만저봐도 알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신비를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께 저희의 부족한 믿음이 주님 뜻에 맞는 믿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오늘 제1독서에서처럼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는 권고에 관해 상기시킵니다. 그 권고는 주님의 훈육을 지키고, 주님께 책망받아도 낙심하지 말며,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신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그분의 가르침을 견디어 내야 하겠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 1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