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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론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을 보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고생스러웠던 때를 뽑으라고 하면, 한 번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할 때이고, 두 번째는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했을 때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청년들과 성경 공부를 하면 단골 질문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지도 않으면서,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우리를 힘들게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한 마디로 고통을 주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질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악에 대한 물음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하느님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천사와 같은 존재로 만드셨으면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으면서 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질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게 한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원인 제공자는 하느님이시기에 그 원인을 없애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분께서는 실제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지 않았고, 고통으로 내몰았을까요? 이집트 탈출 사건만 보더라도 하느님은 약자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시어 그들 편에서 그들을 대신해서 싸워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를 억압한 것은 파라오이며, 파라오가 다스리는 거대한 문명국가였습니다. 생명을 연장할 만큼의 양식이 주어진다 하여도,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기계적인 삶일 뿐입니다. 침해된 자유는 서로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은 고통과 신음 속에서 살고 있으며, 멸망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8,18-23).”(‘준성사’)고 합니다.

 한편,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악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이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어느 모로든 악에 대한 대답 아닌 것이 없다.”(309항)  

  “하느님께서는 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나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이러한 변화는 어떤 존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소멸을, 더 완전한 것과 더불어 덜 완전한 것을,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그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리적 선은 물리적 악과 공존한다.”(310항)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신 것일까요? 그분은 우리의 외침을 외면하고 있으신가요? 간혹 교황님 기사의 댓글을 보면, 악성 댓글을 많이 봅니다. 오늘날 코로나 19로 고통받고 있는데, 기도가 안 이루어진다며 비아냥거립니다. 이 질문에 교회 공동체는 대림시기 깨어 기다리는 신앙, 회개하는 신앙, 기쁨의 신앙, 희망의 신앙으로 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