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말씀묵상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에서 이해가 안 되는 점을 묵상해 보았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지 않는 대목이다.

실제 상황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

실제 상황에서 비유처럼 행동하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비유의 논리라면 남을 위한 희생이 무의미해진다.

초점이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인지부조화인지는 몰라도, 예비 기름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은총과 일치 속해서 행해진 '착한 행동'

그리고 '사랑'이라는 해석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분명 두 해석은 나누는 행위다. 물론 그것이 기도여도 말이다.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이와 같다.

예를 들면, 내가 기도해서 다른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분명 이것이 가능한데, '기름'은 나눌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구를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에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물론 구원의 결정권자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된다.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열 처녀의 비유에서 의문이 드는 것은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이 없는가? 하는 부분이다.

극단적으로는 저 사람 대신에 제가 '지옥' 가겠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 실천은 오로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만이 사용 가능한가?

그러면 전대사를 양도하는 것은 교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열 처녀의 비유는 위와 같은 내용의 텍스트는 아닐 것이다.

이 비유는 기다림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세례 때 선물로 받은 밝게 켜진 등을 잘 유지하라는 말씀이다.

등이 제 구실을 하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고

기름 보충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죄가 등을 끌 때마다 서둘러 다시 켜야 한다.

이때 누가 대신 켜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성경 말씀이나, 그동안의 선행으로 말이다.

'어리석은 처녀'도 기회가 늘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신비여서, 왜 이렇게 되는지는 그분께 맡겨야 하겠다.

 

아무튼 이기적인 처녀가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