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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론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루카 6,6-11)

예수님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는 전형적인 이적사화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사람을 치유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를 안식일 ‘논쟁사화’로 소개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율법에 금지된 노동행위지만 생명이 위독하다고 여겨질 때에 한해서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일이 해가 질 때까지, 곧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위급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유다교의 법 해석은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도 목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반 병자까지 고쳐주는 좋은 일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남을 해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치료 행위는 노동의 차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의 설립 취지가 쉼이고 재생이고 해방이라고 한다면, 병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안식일 정신에 합당한 행동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보고 고발하려고만 했을까요?

 

저는 일단 그들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계명 자체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말이죠. 예수님을 못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고통을 못 보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처럼, 부자가 라자로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곧 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류로 저는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로 ‘이기적 구원관’라 작용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기에 자기 자신만 또는 자기가 속한 그룹만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받기 위해서 규칙을 철저히 지켜야 하다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느낄 자리를 없게 했던 것입니다. 복음에서와 같은 그들의 행동의 근원에는  잘못된 구원관이 자리 잡았던 것이고, 그것을 하느님 보다 더 위에 놓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해서 예수님만을 위해서 타인 고통쯤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이기적 구원’이 아닌, ‘보편적 구원’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신앙생활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