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인은 모성애를 기반한 믿음이다. 곧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이 폭발하였다. 마치 차에 깔린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차를 들어 올리는 어머니나,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어머니를 연상하게 한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대단한 점은 당시 통념을 깨고 이루어낸 결과다. 당시 통념은 유다인이 가진 이방인에 대한 종교적 멸시다. 메시아를 통한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상황에서 이 여인은 자신의 믿음으로 확장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이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이 예수님께 부탁했던 방식과 비슷하다. 이렇게 본다면 성모님이 신앙인의 귀감인 것처럼, 이방인의 여인으로서 그는 이방인에게 참으로 귀감이 되는 부인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다만 그것을 믿느냐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가나안 여인은 모성애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놓지 않았다. 대부분은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한다. 하지만 자식 사랑을 주님께 의탁하며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자식 사랑이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식 사랑 때문에 그녀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자식 사랑이 믿음의 전적인 요인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녀의 믿음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하느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그 믿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실체를 그 여인을 통해 보여주셨다. 물론 여기에는 여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있어야 합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합작인 듯싶다. 주도권은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의 동의와 협력이 필수다.
한번 가정을 해 본다. 내가 가나안 부인이라면 어떠했을까? 나 또한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 무수히 원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침묵과 하느님의 뜻에 의심했을 것이다. 그 전에 작은 믿음조차 있었을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아직도 믿음이 약한 나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