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연구]
마태 18,21-19,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18,21-22)
2. 매정한 종의 비유(18,23-18.35)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하시며,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말씀의 초대).
* 탈렌트: 당대 통용된 가장 큰 화폐. 한 탈렌트는 육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20년 가까이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어제 '파문'을 언급하면서 18,15-17절에서는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는 형제들을 공동체 안에서 내치는 것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이번에는 형제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서 할 경우에 얼마큼 용서해야 하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질문의 초점은 '용서의 횟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성원들 간에 벌어지는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언제든 포용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데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복음의 은총으로 하느님께 한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그 은총으로 계속해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가 복음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주인이 자비를 베풀듯이 종들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비유에서 보이듯이 자비를 입은 사람이 빚진 동료를 가혹하게 대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를 용서의 횟수에 머물지 말고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데에 초점을 두라고 다시 언급하시면서 마무리하십니다.
매정한 종을 들여다보면, 사람이 왜 그리 이기적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종은 가족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주인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비를 베풉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까지만 머물게 됩니다.
최근에 읽은 소설이 있습니다. <침묵>으로 잘 알려진 엔도 슈사쿠의 <전쟁과 사랑>입니다. 이 책의 배경은 제2차 세계 대전이며 내용은 이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에 강제 수용소인 아우슈비츠가 나오는데, 그곳의 장교들은 단란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그 장교들은 가족까지만 사랑하는 한계를 보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극단적 예시일 수 있지만, 자비에는 한계가 없어야 하는 게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있어서 범위와 한계가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용서의 한계와 범위를 제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받은 자비를 생각하며, 내 이웃의 허물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을 마음을 새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