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과 공로, 그리고 보상에 대하여'(187-197쪽)
'공로'(merium)
공로는 인간의 선행과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선행은 의화의 원인과 대가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선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행은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다. 물론 선행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은총이다.
은총은 성행에 앞서고, 선행을 동반하며 또한 뒤따른다. 곧 선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은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의화와 구원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이다. 구원은 내가 얼마나 선행을 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비례적 관계는 '보수적 공로'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했다.
보수적 공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의합적 공로'가 있다. 이 개념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 어떤 선행이 공로로 인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보상에 대한 말씀들 때문이다.
선행과 공로 보상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되고 그분의 자비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선행을 통한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려야 한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 선행을 마치 우리의 공로인 것처럼 여겨주시는데 이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다. 천국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다.
"누구든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1코린 1,31)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그러니 이제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 ",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말들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 은총 덕분으로 우리가 행할 수 있었던 선행에 대하여 그것을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