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5,9-17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제자들에게도 나눠주셨다. 그리고 당부하신다.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그 방법으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이 제자들 안에 있고 기쁨으로 충만해진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한계는 정해주지 않으셨다. 다만 가장 큰 사랑이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실천하면 종에서 친구로 승격(?) 된다는 파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시면서 계약을 지키면 너의 하느님이 되시겠다고 하셨다. 아직은 좀 멀리 계신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사랑하면 주님과 친구가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종과 친구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노예제도를 현실상 접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갑을 관계를 보면 그 관계가 얼마나 비인격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지를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된다. 친구 관계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예수님 이전에 인간을 비인격적으로 폭력적으로 대하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는 인간 세상에서의 친구 그 이상이다. 서로에게 비밀이 없는 사이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겼던 이유가 내세의 구원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외세의 침략에서 보호받는 안전, 평화, 번영의 염원이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이 무슨 이유로 그 일을 하시는지는 몰랐다.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여 주신 것이다. 이 말 뜻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곧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참행복, 참기쁨, 참평화, 진리, 영원한 생명, 부활 등등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런데 실상 하느님 앞에 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아닌 종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종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로보트처럼 말이다. 아무런 감정도 없고 의지도 없고, 가장 중요한 사랑 없이 말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예수님과 친구처럼 사는 연습을 안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유교 문화권에서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하기는 참으로 어렵다(장유유서를 교육받은지라). 일단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이웃과 어려운 사람을 사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