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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묵상

부활 제2주간 화요일_'들어 올려지다'(힙소오:ὑψόω)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구리 뱀 이야기는 민수 21,8 이하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대들었다가 그 벌로 불 뱀들에게 물려 죽는다. 나중에 백성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해 달라고 빌자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 구리 뱀을 기둥에 매달게 하시고 뱀에게 물려 죽어 가던 자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살 수 있게 하신다. 구리 뱀 사건을 십자가 사건의 예표로 보는 견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 그러나 초기 교부들의 문헌에는 자주 눈에 띈다. 구리 뱀은 예수님의 몸, 구리 뱀을 달아맨 기둥은 십자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들어 올림 차제다. 십자가 처형 그 자체를 고양이요 영광이라고 본 것은 신약성경에서 요한만의 독특한 견해다. 오히려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요(1코린 1,23) 저주였다(갈라 3,13).       <거룩한 독서를 위한 신약성경 주해 요한 복음 중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강생하셨기 때문에(하강) 필연적으로 승천하셔야 했다. 승천은 다른 말로 하면 영광스럽게 되셔야 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힙소오'하셔야 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구리 뱀이 '힙소오'했다. 이 단어는 '매달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구리 뱀이 '힙소오'하는 것은 구리 뱀이 매달린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도 구리 뱀처럼 매달리면서 들어 올려지시는 것이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된다.  곧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운명적인 고양이면서 영광스러운 방식인 것이다. 왜 이러한 방식이어야 하는가 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 말고는 얻을 게 없을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왜 카인의 제물을 반기시고 아벨의 제물을 반기시지 않으셨나요?'와 비슷한 질문이다.

 

그러면 요한 복음 사가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 성 요한은 왜 십자가 처형을 영광으로 보았을까? 거룩한 변모도 있고, 부활도 있고, 승천도 있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여러 표징도 있었는데 말이다. 구리 뱀을 들어 올린 것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려고 한 것이고 십자가 처형 역시 많은 이들에게 본보기 식이기 때문에 들어 올림(영광)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심순화(가타리나) 화백이 지난 3월 27일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인류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주례하고 특별 강복을 내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심순화 화백 ‘착한 목자’(부분)

 

심 화백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습을 보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혼자 기도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며 “모두가 힘든 지금, 이 작품을 보면서 ‘착한 목자’이신 교황님을 위해 다 같이 기도를 모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는 <가톨릭신문> 기사 인터뷰가 있다.

우리 삶의 무게 대신 짊어진 교황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인 가파른 언덕을 홀로 오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뒷모습. 굽은 등이 우리의 힘겨운 삶을 대신 짊어진 듯 느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

www.catholictimes.org

 

그림을 보면서 십자가의 신비는 알 수는 없지만, 성 요한이 왜 십자가 처형을 들어 올림(영광)으로 이해했는지 아주 조금 느꼈다. 그러면서 나도 저렇게 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오로지 하느님 뜻만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