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만 일어나지 않고 이후 여러 곳에서 발생한다. 동시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선후 관계는 잘 모르지만 오늘 복음을 보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시고, 그들이 곧바로 예루살렘에 가서 보니, 시몬에게도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었다.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까지 나타나셔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셨을까? 분명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임을 증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증인이 많을수록 더 신뢰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멀리 있던 이에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소생이나 조작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마리아야!" 이 한 마디로 주님의 부활을 알아차리게 되었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에 비하면 부활을 믿는데 훨~씬 오래 걸렸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아주 티테일하게 알았던 인물들이다. 예수님의 외모와 음성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물론 부활하신 모습은 부활 전의 모습과 달랐을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들은 금방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듣고 그것도 모자라서 어떤 집에 들어가서 빵을 떼어 나누어 줄 때 알게 되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긴가민가 하였던 것이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5-26)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면에서 내가 믿는 게 맞나? 하고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직접 봐야 믿는 토마스 사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씀을 다 듣고, 설명을 다 듣고 해도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파스카의 신비가 무엇인지 긴가민가할 때가 있다. 기도할 때나, 미사에 참례할 때나 하느님이 듣고 계신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체를 영하면...... 혹은 고해성사를 보고 나면...... 순간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제자와 비슷한 신앙 체험, 신앙 유형이 아닐까 싶다.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내 모습과 닮았다. 믿는 데에 굼뜨냐? 예수님의 저 말씀이 정겹게 다가온다. 굼뜨더라도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매한가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