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묵상거리
1.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죄지은 사람과 오버랩
2. 더러운 영의 표현 :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3. 구마 사건 이후 게라사인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태도 변화
4. 함구령을 예외적으로 허용
묵상거리
1.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죄지은 사람과 오버랩
2. 더러운 영의 표현 :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3. 구마 사건 이후 게라사인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태도 변화
4. 함구령을 예외적으로 허용
1번 2번 묵상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모습에서 죄 지은 인간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무덤에 살고 자기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주위를 소란스럽게 하는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마치 죄 지은 인간을 떠오르게 한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극단적인 죄의 모습이라면, 죄 지은 인간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내면에서 그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여겨졌다. 생각과 말에서 있어서 이 둘은 같은 양상을 띠며, 행동에 있어서는 한 쪽은 과하고 다른 쪽은 숨겨져 있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둘 다 ‘무덤’과 같은 곧 하느님 편에서 죽은 것과 같은 사람과 비슷하다.
3번 묵상
구마를 구경한 이들과 구마를 체험한 이의 태도가 아주 다르다.
정확하게는 구마로 인해 경제적 손해를 본 이와 촌락 사람들은 하느님보다는 기존의 삶을 택하고,
구마를 체험한 이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택한다.
체험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완고한 마음을 대변한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믿음이라는 것이 소위 기적을 본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닌 것이다.
흔히들 기적이 일어나면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기적은 일상에서 늘 일어나고 있다.
우주에서, 자연에서, 사람들에게서
속물적으로 누군가는 적은 확률이지만 로또에 당첨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지는 않는다.
4번 묵상
다른 이들에게는 함구령을 내리는데, 왜 이 사람에게만 예외적으로 함구령을 해제하셨을까?
마르코 복음 사가가 편집을 잘못한 것일까?
주석서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와 8절에서 함구령이 내리지 않는 것은 ‘메시아의 비밀’과 상반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다 땅을 떠나 계시고, 알리라는명령이 당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행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함구령을 해제한 것이 아니라, 성부와 관련된 것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최소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혹은 엘리야와 같은 사람으로만 여길 것이다.
여기서 번외 묵상을 하면 예수님이 ‘주님’, ‘그리스도’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평소에 이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경솔하게 행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도 게라사인들과 비슷한 시선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