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말라 3,1-4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뜻하지 않게 갑자기 자기 성전으로 오신다고 한다.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 공의 잿물 같다고 하면서 죄를 깨끗이 씻어 준다는 뜻을 직유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복음 루카 2,22-40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마리아에게 아기가 반대받은 표징이 되리라고 한다.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령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관하여 전한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이렇게 두 개의 손길과 마주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손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품에 안는 두 팔입니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도움과 손길을 요구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두 팔로 따뜻하게 안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우리의 손길과 도움을 청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두 손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fr. 박형순)
위 글을 읽고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어떤 측면에서 필요하고, 어떤 측면에서 필요가 없으시다.
필요가 없으신 것은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지만 전능하다고 해서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하실 수 있지만, 혼자서 안 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마음이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기로 하셨다.
하나이시지만 위격으로는 따로 존재하신다.
어쩌면 우리 눈에는 신비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인 것이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초능력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초능력자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가 없다. 관계 맺을 이들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어떤 게 필요 없고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능력은 있지만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다르다. 사랑 자체이시기에 대상이 꼭 있어야 한다. 그 방식을 선택하신 것이다.
사람이 혼자서 죽는 것을 고독사라고 한다. 외로워서 죽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 사랑이 사람의 생명을 쥐고 있다. 지옥은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 복음에서 인류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도움, 인간의 두 팔에 받아 안겨 계신다. 세상 끝날에는 그분께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씻어주시고 의롭게 해 주실 것이지만, 지금은 그분께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신다. 가서, 노숙자, 방황하는 청소년, 사랑과 관계가 결핍이 된 이들, 죄에 물든 이들을 당신 대신에 안아 주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