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믿고 기도하기
하느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관계가 요약되어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무엇보다 기도로 이루어진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다.
이 대화는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에 따라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으로의 초대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어떠하지를 알려주고 시작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 6,9; 루카 11,2 참조)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기도하는 이가 하느님께 향하고 있다.
기도하는 이는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관계된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고, 또 하느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르고자 한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소서!”
여기서 관건은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기도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의 힘이 커지고 막강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세력과 폭력은 일시적이고, 이 세상이 의미를 제공하고 구원을 약속하는 것은 종국에는 유지되지 못하며, 우리는 하느님 없이 나아갈 수 없다는 확신이다.
주님의 기도 후반부는 우리의 일상과 걱정거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제로 한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는 먹을 것과 살 곳은 물론, 정의와 소속감도 필요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탄없이 청해도 되고, 또 청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법을 날마다 새롭게 연습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양식’을 교부들은 ‘성체’로 이해하기도 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문장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약속이 담겨 있다.
그것은 ‘용서’다.
하느님의 용서에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이를 용서할 준비와 실천을 해야 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원망을 내려놓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더 이상 들춰내지 않고 그에 대해 보상받으려 하지 않으며,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상대방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은 평생 필요하다.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누구나 용서를 빌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은 일상적인 유혹이나 몸과 정신을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초콜릿이나 담배에 대한 유혹, 힘이나 영향력, 돈에 대한 유혹 역시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못하거나 하느님께 실망하거나 그분의 구원 약속을 믿을 수 없거나 그 약속을 놓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는 소심함이나 과도한 걱정, 불신에서 생기는 유혹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악의 존재와 그 파괴력을 부정하거나 무해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마지막 청원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악의 세력을 꺾을 수 있으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세상을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한 줄 실천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기도해 보아요.>
신앙고백
신앙고백은 초세기 교회에서부터 발전되어 온 것이다.
일찍부터 사도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신앙고백 형식과 본문,
곧 신앙에 관해 짧게 요약된 글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글에는 두 가지 주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과 삼위이며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앙고백 본문들은 구세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앙고백 가운데 특히 두 가지 유형이 널리 퍼져나갔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니케아 공회의(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은 전례에서 탄생했다.
세례 때 집전자는 세례자에게 묻는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 믿습니까?
성령을 ... 믿습니까?“
사도 신경은 이 물음들을 고백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사도신경의 첫째 부분은 창조주이자 아버지인 하느님에 관한 것이다.
둘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아드님 안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이 결정적 요소다.
셋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서 활동하심을 고백한다.
한 줄 실천
<사도신경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바쳐보아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필리 2,11 참조)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말이다.
메시아는 하느님께 기름 부음 받은 이, 하느님이 옥좌에 앉히신 임금, 약속된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정의와 구원을 보증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이러한 메시아이심을 확신한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적용되는 칭호를 예수님께도 사용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이라는 확신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을 최종적으로 계시하셨음을 그리스도인들은 믿는다.
그분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참조).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다(10,30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단지 좋은 분이라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께 몸과 영혼을 맡겨드리고 예수님을 주님, 구세주로 여긴다.
그분을 만물의 기준이자 모든 희망의 지평으로 여긴다.
십자 성호
십자가는 구원과 생명과 희망의 표지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과 복음을 믿는 것,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을 따르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더 나아가 목숨까지 바치며 세상의 죄와 필요를 위해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 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을 내린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성찬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대하게 기린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는 축복의 표지이자 믿음의 표지다.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서면서 성수를 찍어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세례 때의 구원 약속을 상기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결단을 위한 것이다.
자기 몸에 십자가를 쓰는 사람, 십자가를 믿음의 상징으로 날마다 새롭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 줄 실천
<십자 성호를 생활화해 보아요>
기도_찬양, 감사, 청원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희망으로 가득 차, 냉철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전 세계적 관심사와 개인적 관심사와 가난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해야 한다.
미사 때나 집에서, 또는 홀로 조용히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청하면서, 모든 이를 구원하겠다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리고 기도 안에서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선의 근원이며 악을 물리치시는 분께 기쁨과 걱정, 성공과 실패를 내맡겨 드린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하느님 앞으로 가져간다.
기도에는 당연히 행동이 따라야 한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며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헌신은 하지 않고 기도만 바치는 것은 자신이 위선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도만 바치는 것으로는 책임을 다한다고 할 수 없다.
기도는 단순히 윤리적인 훈련이 아니라 날마다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사욕 없이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한 줄 실천
<기도 후 행동으로 실천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