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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론

가장 큰 계명(마태 22,34-40)

[말씀 연구]

바리사이들이 제기하는 두 번째 논쟁이다.

당대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

1) 모든 계명 준수하려는 경향 2) 핵심 계명을 추구하는 경향

 

예수님은 이 두 가지 경향을 상황에 따라 강조하고 제시하신다.

1) 산상 설교에서는 율법이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강조

2) 이 논쟁에서는 독특하게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제시하심

 

율법 규정이 613조항이 있는데, 준수 규정이 248조항이고 금지 조항이 365조항이다.

 

"둘째"는 중요도의 순서가 아니라 나열된 순서다.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웃 사랑만 거론해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보기도 한다(7,12; 로마 13,9)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수행하는 길을 준비해 주는 한편 둘째 계명에 의해 확립된다(키릴루스).

 


 

마태오 복음 22장 15절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의논을 합니다. 이후 오늘 복음을 보면, 그들은 한데 모입니다. 이러한 모임이 정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없애려고 거대 조직이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 중 가장 탁월하고 출중한 사람을 내세워서 율법 학자들이 오래도록 사색하고 논의하던 물음을 예수님께 제기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은 613개 율법 규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는 물음이며, 전체 율법 규정을 통달하지 않고는 답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어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 계명을 거론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아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첫 번째 답변과 두 번째 답변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답변, 곧 짧게 줄여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약 성경에서 발견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교사도 할 수 있는 답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의 탁월함과 독창성은,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에 똑같은 중요성을 부여하시면서 둘을 연계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율법 전체를 이 두 계명으로 한데 모으시고 단순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은 이 두 가지 율법을 한데 모아 “가장 큰 계명”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 따로, 이웃 사랑 따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라는 게 자명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이 실제로 어떻게 같이 실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일생은 이 두 계명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구속 행위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며(이웃 사랑), 그렇게 예정하신 하느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하느님 사랑).

 

심지어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웃 사랑만 거론해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설명하는 성경 구절이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 13,9)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한 1서의 말씀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